전북특별자치도 성공 위해 도민 참여와 장기적 비전 절실

경제적·이념적 양극화로 최근 우리 사회가 겪는 갈등의 골이 깊어지고 있다. 정치권에서도 여·야의 이해관계가 난마처럼 얽히면서 해결의 기미가 보이지 않고 있다.
전주 출신인 은재호 박사는 갈등 해소 전문가다. ‘갈등 해소’는 해당 분야에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진지한 학술 분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수도 있다. 대중의 머리 속에 '갈등 해소 전문가’는 오랜 수행을 한 수도자가 대통령선거 무렵 유력 후보와 선문답을 주고받는 모습으로 각인됐다.
하지만 은 박사는 정치학으로서의 갈등을 연구했다. 프랑스 고등사범학교(ENS-Cachan)에서 정치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그는 현재 국무총리 산하 한국행정연구원 선임연구위원으로 재직하며, 다수의 정부부처 갈등관리심의위원을 맡고 있다. 그에게 갈등은 ‘좋은 마음’으로 푸는 것이 아닌, 투명한 소통과 사회적 구조로 풀어나가야 하는 과제다.
"만나야 문제가 풀린다"
그에게 도무지 답이 나올 것 같지 않은 첨예한 갈등을 어떻게 풀어가야 하는지 물었다. 은 박사는 “서로 만나게 하면 된다”고 말했다. "사람들이 반대를 할 때는 다 이유가 있어요. 그런데 솔직히 말을 안 해요. 일단 다 같이 만나서 대화를 시작하면 솔직하게 말하게 돼요. 솔직하게 말을 해야지 해법을 찾죠."
송전선로 설치를 둘러싼 갈등도 마찬가지다. "국가적·사회적 필요에 대한 공감대가 있고 각자의 이해관계가 드러나면 조정할 수 있어요. 만나지 않으면 어떤 걸 조정해야 하는지도 알 수 없죠."
최근 윤석열 대통령과 한동훈 대표의 만남도 그 내용과 상관없이 의미가 있다는 게 은 박사의 견해다. "대통령하고 한동훈 대표하고 만나는 게 어렵지만, 만나고 나면 뭔가 이제 갈 방향을 알게 되잖아요. 설사 좋지 않은 대화를 나눴더라도 그 자체가 다음 행보를 정하는 메시지가 되는 거죠."
허무할 정도로 단순하고 명쾌한 해결책이 있는데 갈등은 왜 해결되지 않는 것일까. 은 위원은 “문제를 풀기 싫어하는 사람들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고준위 방폐장 이야기를 해보죠. 고준위 방폐장은 꼭 필요하지만 그것 때문에 치러야 될 대가가 너무 많아요. 표가 떨어지고, 예산이 필요해요. 권력을 쥐고 의사결정 권한을 가진 사람들이 나서야 하는데 하지 않죠. 그게 님투(NIMTOO: Not In My Terms Of Office, 내 임기 동안에는 안돼)에요.”
그는 사회적 갈등 해소를 위해 의사결정권을 가진 사람들이 치밀하게 장기 계획을 세워야 한다고 설명했다. “옛날에는 나라를 위해 뭘 하자! 하면 거역할 수가 없었어요. 그런데 이제는 과거처럼 속전속결로는 더 이상 못해요. 장기적인 대책이 있어야 합니다.”

전북의 과제: 도민 통합
은 박사는 새롭게 출범한 전북특별자치도에 대해서도 장기적 대책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건 우리나라 단위는 물론이고 도 단위에서도 필요하다고 봐요. 전북이 침체됐다고들 합니다. 인구 소멸 이야기도 나오고 있는데, 여기에 어떻게 대응을 할지에 대한 긴 안목의 비전이 있어야 해요.”
전북 도민, 전문가 집단이 모두 관여한 미래 장기 전략이 시급하다는 게 은 박사의 진단이다. “장기 전략을 지금까지는 전문가들이 자기들 머릿속에서 그려냈어요. 그러다 보니 도민들과는 아무 상관도 없고, 정권 바뀌면 또 되돌아가 버리죠. 그런데 도민들이 다 모여서 ‘우리는 이런 전북특별자치도를 원합니다‘라고 한다면 다음 정부에 누가 들어오든 쉽게 무시할 수 있겠어요?”
그는 미래 비전 수립이 전북 예산 확보에도 절실하다고 지적한다. "옛날에는 대통령이나 유력 정치인이 선심성 예산을 펑펑 내주기도 했어요. 하지만 지금은 그런 시대가 아닙니다. 중앙 정부 입장에서 돈 쓸 이유를 만들어줘야 해요. 유권자에게 보여주기식 예산 따오기가 아니라, 이 사업이 전북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발전에 도움이 된다는 걸 설득해야 합니다."
은 박사는 전북에 대한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단순히 이름만 특별자치도가 돼서는 안 됩니다. 실질적인 권한 이양과 재원 확보를 위해 노력해야 해요. 그러기 위해서는 전북이 전북 내부의 갈등과 이견을 어떻게 해결하는가가 중요합니다. 정치인들이 자신의 이권을 내려놓고 올바른 방향의 의사결정을 하지 않으면 전북의 위기는 심화될 수도 있어요. 앞으로 몇 년이 특별자치도 성공의 시금석이 될 것입니다."
은 박사는 "전북의 장기 비전을 수립할 때는 도민들의 참여가 필수"라고 재차 강조했다. "몽골·싱가포르처럼 국민들이 참여해 미래 비전을 만들고, 그것을 정책 목표로 삼아 추진하는 모습을 배워야 합니다. 도민들이 다 모여 '우리는 이런 전라북도를 원합니다'라고 할 때, 그 힘은 누구도 무시할 수 없을 겁니다.”

‘과잉통합‘의 시대, 정치가 모든 것을 지배
은 박사는 한국 사회의 특징으로 '과잉통합'을 지목한다. 과잉통합은 ‘체계통합’의 관점에서 정치 등 사회의 한 기능체계가 다른 기능체계를 교란할 정도로 비대해진 경우를 뜻한다.
"정치 체계가 다른 모든 체계를 다 지배해요. 체육계, 언론계, 학계 등 각 분야가 정치로부터 자율성을 가지지 못하고 있죠."
지난 국정감사에서 걸그룹 뉴진스의 멤버인 하니와, 정몽규 대한축구협회장이 출석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다. "음악산업과 축구협회 등 사회의 전반적인 부분이 정치에 크게 의존해요. 정치의 힘이 막강하고, 정치 이외의 경제·체육·언론 등 사회가 자율성을 가지고 투명하게 경쟁하지 못합니다. 성장하지 못해서 자신들의 문제 해결을 정치에 의존하고, 정치에 의존하니까 성장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계속되는 거죠."
"우리 몸으로 치면 머리만 비대해지고 나머지 기관은 제 역할을 못하는 것과 같아요. 각 분야가 자율성을 가지고 균형 있게 발전해야 하는데, 정치가 모든 것을 좌우하고 있는 거죠."
은 박사는 정치의 역할을 재정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정치는 결과가 아닌 과정을 감독해야 한다는 것이다. “국가는 절차가 투명하고 공정하게 이루어질 수 있도록 감독하고 감시하는 역할을 해야 합니다. 정치는 '누구'를 뽑느냐를 결정할 게 아니라 '어떻게' 뽑느냐를 도와줘야 해요. 어느 단체의 회장이나 사장 같은 사람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그런 책임 있는 사람을 뽑는 방식을 투명하게 만들도록 도와야 합니다."

"개헌, 10년 후엔 가능할 것"
은 박사는 한국 사회의 근본적인 변화를 위해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한다. "대통령의 제왕적 권한을 분산하고, 선거제도를 바꿔 다당제로 가야 합니다. 현재의 양당제는 적대적 공생 관계에 있어요. 서로 싫다고 싸우면서도 실은 상대방의 존재 때문에 본인의 존재가 유지되는 거죠."
지난 10여년 동안 개헌은 구체적인 논의 과정에도 이르지 못했다. 하지만 긴 관점에서는 희망적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10년 전보다 개헌에 대한 공감대는 많이 확산됐어요. 대통령제를 바꾸고 국회의원 제도를 바꾸는 것에 대한 공감대도 형성됐죠."
합의된 방향을 향한 느리지만 꾸준한 움직임이 은 박사가 추구하는 진정한 사회 통합이다. “지난 총선에서, 비례 위성정당을 만든 이재명 대표가 국민들께 사과했어요. 작은 일이지만, 21대 선거에서는 없었던 일이에요. 그 문제가 4년 만에 당 대표가 사과해야 할 문제가 된 거죠. 느리지만 확실한 방향성이 있죠.”
물론 그런 변화가 저절로 오진 않는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지금의 정치인들은 개헌을 하자고 말만 하지, 실제로는 원하지 않아요. 당장의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죠. 하루아침에 모든 것을 바꿀 순 없지만, 우리는 옳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누군가는 계속 필요하다고 말하고, 누군가는 계속 하자고 하다 보면, 마치 일식이나 월식처럼 어느 순간 개혁의 기회가 올 거예요. 그때를 위해 우리는 계속 목소리를 내야 합니다."
서울=이용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