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현대사회는 신이 없는 시대, 신부재의 시대라고 말한다. 도덕이나 윤리는 물론 신에 대한 관심도 점점 줄어들고 있다. 무신론자들은 신이 없는 빈 자리를 과학으로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물질적 욕망이 지배하는 거대한 물질문명시대로 진입한 것이다. 바야흐로 이성과 진리, 양심과 신앙, 그리고 인간성이 상실된 시대가 되었다. 현대사회의 모든 병리현상은 삼라만상의 창조주이신 신을 상실한데 그 원인이 있지 않을까?
단군사상은 남과 북이 모두 공유하는 건국이념이다. 그런데 북한은 단군의 경천사상을 부정하며 단군을 수령영도론과 연결시킨다. 그리고 민족사를 계급투쟁에 맞춰서 설명하고 있다. 훈민정음의 창제도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착취하는 수단으로 본다. 불교를 주관적 관념론, 유교를 객관적 관념론이라고 배격한다.
정통성이란 북한처럼 미움과 당파성의 철학에 기초해서는 안된다. 공명정대한 사랑과 보편성에 기초해야 한다. 공명정대한 정신과 인간성을 존중하는 사상에서 정통성을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건국사상에서 홍익사상은 너와 나의 ‘삶의 공존장’이며, 종교사상과도 맥을 같이한다. 그러나 북한의 유일 독재체제처럼 과장된 이데올로기나 과격한 폭력이 횡횡하는 사회에선 광명사상이 나올 수 없다.
모든 철학과 가치관의 싸움은 신관의 싸움이다. 기독교 유신론의 대표적인 관념론 철학자인 헤겔은 하나님을 요한복음의 로고스(말씀)인 ‘절대정신’으로 이해했다. 기독교 하나님의 창조를 절대정신이 스스로 전개된 것이라했다. 관념의 하나님이 물질인 자연으로 스스로 전개된 것을 창조라고 한 것이다. 이것이 그 유명한 헤겔의 ‘스스로 운동하는 정신’이라는 개념, 즉 기독교의 신이다.
여기에 마르크스는 ‘스스로 운동하는 정신’ 대신에 ‘스스로 운동하는 물질’ 개념을 만들어낸다. 관념론이 스스로 운동하는 ‘정신적 신’이라면, 유물론도 스스로 운동하는 ‘물질적 신’을 주장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의 어둡고 기이한 발상이었고, 드디어 관념론을 유물론으로 도립시키는데 성공한다. 이 관념론과 유물론의 싸움은 유신론과 무신론, 민주와 공산의 싸움으로 번져나간다. 그 싸움의 본질은 바로 신관의 싸움인 것이다.
철학자 니체는 ‘신’의 죽음을 선포했다. 헤겔의 기독교 관념론의 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죽지 않았으면 죽여야 한다고 했다. 왜냐하면 기독교의 신은 정신적인 신이고, 병들어 있는 신이며, 가장 부패한 신 개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니체 이후 기독교 신학은 ‘신죽음의 신학’으로 흘러간다. 사망한 신을 다루는 신학이라는 의미이다. 기독교의 초월적인 신, 정신적인 신을 왜곡된 신이라고 하면서 그 신을 추방한 것이다. 저 멀리, 저 높이 물질세계를 떠나 정신세계에 할 일 없이 계신 초월적 신을 버리고, 역사 속에서 우리와 함께 계신 신을 받아들이자는 것이다. 그 신이 그리스도요, 예수라고 고백한다. 예수는 신의 계시이며, 육신이 되신 신 자신이라는 것이다. 가톨릭 교회의 정통주의 초월적 신관을 버리고, ‘그리스도가 신‘ 이라는 신관으로 대체하게 되는데. 이것이 신정통주의이다.
그런데 기독교는 성부 하나님과 성자 예수님의 차이를 분명히 밝히고 있다. 창조주 하나님과 역사적 예수를 동일시하지 않는다. 십자가상에서 “아버지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라는 마지막 기도는 창조주 아버지와 아들 예수의 존재론적 차이를 분명히 보여준다.
신통일한국론에서 제시하는 신은 마음과 몸의 통일을 통해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아버지 하나님이다. 그리고 하나님(신)과 인간은 부자관계이다. 하나님은 저 천상에서 정신적 생각만을 즐기는 정신적 실체가 아니라 정신과 물질, 마음과 몸이 합일하는 경지에서 우리의 삶에 현현하시는 ’아버지‘인 것이다. 그러기에 정신만을 실체로 보는 관념론과 물질만을 실체로 보는 유물론 둘 다 옳지 않다. 신은 피조세계와 다른 차원에서 존재하는 초월자이지만, 서로 닮았기 때문에 피조세계와 함께 운행하는 내재자이기도 한 것이다.
그리고 창조주 신은 참사랑으로 남편과 아내가 하나된 자리에서 나타나신 하늘부모님으로 정의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모습대로 한 남자와 한 여자를 창조하셨다(창1장27절)“는 성서의 말씀과 일치한다. 이처럼 하나님은 하늘 부모님, 또는 참부모 하나님이신 것이다. 이 참부모 하나님에 대한 신관은 우리나라의 경천사상에서 섬겨온 ’하늘‘ 그리고 그 ’하늘‘을 부모처럼 모시는 단군사상과 일치한다.
이에 이 시대 우리는 과거 선민 조상들이 실천했던 경천(敬天), 홍익(弘益), 광명(光明)의 정신으로 이 혼란 난관의 상황을 슬기롭게 극복해나가야 되지 않을까?
정병수 남북통일운동국민연합 전북회장
※본 칼럼은 <전민일보> 편집 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